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보르도 Bordeaux로 떠났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보르도가 프랑스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어렴풋이 와인의 도시로만 알았습니다. 보르도는 프랑스 남서쪽에 있는 항구 도시로 도시 모양이 초승달을 닮아 달의 항구 Port de la lune 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스페인 피레네 산맥에서부터 대서양까지 흐르는 가론 강 La Garonne와 우아한 팔레 드 라 부르스 Palais de le Bourse의 물의 거울 Mirroir d’Eau이 유명하죠. 와인을 잘 먹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파리 이외의 도시를 경험해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도시인 파리와 다르게 넓게 펼쳐진 포도밭과 따듯한 햇살을 상상하며 설렜습니다.
숙소로 이동하는 트램에서 현지인을 만났는데 왜 보르도에 사냐 물었더니 시크한 파리와 다르게 사람들이 여유로운 미소를 띤다고 했습니다. 보르도는 길이 넓고 담배나 대마 냄새가 없었습니다. 늦은 밤인데도 공원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평화롭게 놀고 있어서 오 안전한데…?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첫날은 자전거 투어를 했습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단체로 진행하는 투어였는데 간단한 설명을 들으며 도시 전체의 윤곽을 빠르게 훑었습니다. 보르도는 로마, 프랑스, 영국 등 다양한 나라의 지배를 받았었다고 합니다. 로마 시대 콜로세움과 영국풍 공원, 프랑스 성당 등 세계의 거대한 흐름을 주도했던 프랑스와 영국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국이 지배하던 11세기~13세기까지 포도주, 의류, 밀 등을 수출입 했고 프랑스가 지배한 17~18세기에 식민지인 아프리카, 서인도 제도의 물자와 노예무역으로 큰 항구 도시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상업적 감각이 탁월했던 영국과 최고급 포도를 키울 수 있는 프랑스가 결합되어 전 세계에 최고급 와인을 퍼뜨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프랑스가 타국의 주요 인사와 결혼식을 열 때, 파리는 너무 프랑스 중심이니 살짝 다른 나라에 가까운 보르도에서 결혼식을 연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여러모로 보르도는 와인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세계의 질서를 주도하던 시기에 두 나라의 사이에 독특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인이 태어나는 품, 떼루와
떼루와 Terroir 는 프랑스어로 토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포도가 자라는 데 영향을 주는 지리, 기후, 재배법 등 모든 것을 아울러 표현하는 말입니다. 유럽에서는 동일한 포도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도 어떤 자연환경에서 만들고 키우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와인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땅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와인 이름에 지역 이름이 붙는 것이죠. 보르도는 바다에 닿은 큰 강인 지롱드 Gironde와 가론 Garonne 강, 도르도뉴 Dordogne을 중심으로 지역을 구분합니다. 강을 기준으로 왼쪽을 좌안 Left bank, 오른쪽을 우안 Right bank이라 부릅니다. 좌안은 북쪽의 메독 Medoc이 유명하고 우안은 생테밀리옹 Saint Emilion이 유명합니다.
보르도에서는 9월 초에 한 달 사이 포도를 수확합니다. 설익으면 당분이 낮아 신맛이 강해지고 바디감이 옅어지고, 너무 익으면 당도가 높아 신맛과 향을 잃습니다. 좌안은 바위, 자갈이 많아 배수가 잘되고 온도를 잘 간직해 까베르네 쇼비뇽을 재배하기 좋습니다. 타닌, 알코올, 산도가 높은 장기 숙성할 수 있는 고급 와인을 만들기 좋습니다. 우안은 진흙이 많아 비옥해 토질에 예민한 메를로를 재배하기 좋습니다. 타닌, 알코올, 산도가 낮아 부드러운 와인을 만듭니다. 보르도는 브루고뉴와 다르게 포도 품종을 섞어 와인을 만들며 좌안은 카베르네 소비뇽을 중심으로 메를로 Merlot, 카베르네 프랑, 쁘띠 베르도, 말벡을 섞고 우안은 메를로 기반으로 나머지를 블렌딩하는 편입니다.
엄격한 규칙
와인은 라벨 명에 따라 판매량이 크게 좌우되는데 인증받은 이름을 쓰기 위해서는 AOC (Appellation Bordeaux Controlee)라는 철저한 기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포도밭 1 헥타르에 포도 나무를 몇 그루 이상 심으면 안 되고, 몇백 리터 이상을 생산해도 안 되며, 알코올 도수는 최소 얼마를 넘어야 하고, 산화 방지를 위한 SO2는 리터 당 몇 밀리그람 써야 하고, 옆집 포도를 섞어도 안 되고 병을 다른 지역에서 사도 안 되고, 일찍 포도를 수확해도 안 됩니다. 공식 전문가가 수확 날짜를 정해 공지하고 그날 이후로 괜찮은 비오지 않는 날을 고른다고 합니다. 엄격하고 철저한 중앙 통제 방식이죠.
또 등급제도 엄격합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전 세계에 보르도 와인을 홍보하기 위해 도입했습니다. 그랑 크뤼 클라쎄라고 불리며 뛰어난 포도원이라는 의미의 그랑 크뤼, 등급이라는 의미의 클라쎄가 합쳐진 말입니다. 와인 가격, 샤토 토질, 지명도 등을 바탕으로 비싼 순으로 등급을 지정했습니다. 5개 등급으로 나뉘고 지금까지도 세습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안은 1955년에 도입되어 10년마다 갱신되는 생테밀리옹 분류 St-Emilion Classification이 있습니다. 그랑 크뤼 클라쎄 A, 그랑 크뤼 클라쎄 B, 그랑 크뤼 클라쎄로 3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단 등급제는 오래된 기준으로 나뉘기도 했고 단순히 유명하기만 하면 높은 등급으로 친 경향이 있습니다. 몇몇 유명한 샤토는 이 등급 심사를 받지 않겠다고 해 의미가 많이 바랐다고 합니다.
우안의 생떼밀리옹 Saint Emilion
보르도에서 귀여운 피아트 차를 몰고 1시간 정도 달려 생떼밀리옹에 갔습니다. 오래된 종탑이 높게 솟아있고 노란 벽돌로 가득한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종탑을 타고 올라가면 마을의 전체 모습과 넓게 펼쳐진 포도밭을 볼 수 있습니다. 8세기 브르타뉴 지방 에밀리옹 Emilion 수도사가 성지를 순례하다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마을입니다. 프랑스 왕비였다 영국 왕비가 된 알리에노리 다키텐 때문에 마을의 소유권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수없이 전쟁을 치렀고 백년 전쟁이 끝나고 완전히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당시 모습을 유지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마을입니다.
따듯한 햇살과 노란 벽돌이 잘 어울리는 투박하면서 정겨운 풍경의 마을이었습니다. 중세 시대부터 이어온 마을의 형태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생각이 드는 마을이었습니다. 대도시의 섬세한 건축물과 다르게 표면에 거친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어떤 기둥은 정말 무게를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모되어 지난 시간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온화한 대서양의 바람, 풍부한 일조량, 배수가 잘되는 흙을 바탕으로 메를로 Merlot과 까베르네 프랑 Cabernet Franc 포도 품종을 재배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떼밀리옹만의 와인을 만든다고 합니다. 자체적인 체계가 있어 포도주의 등급도 매긴다고 하네요. 외국인이 안동 하회 마을을 오면 이런 인상을 받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좌안의 메독 Medoc
가론 강의 왼쪽의 메독을 투어했습니다. 가이드 분의 차를 타고 편하게 둘러보았습니다. 보르도하면 떠오르는 넓은 포도밭과 멋진 저택을 보러 떠났습니다. 샤토는 성 대저택이란 프랑스어로 포도원에 있는 저택, 양조장, 포도밭까지 함께 지칭하는 말로 포도 양조, 병입, 출하를 모두 하는 와이너리를 말합니다. 좌안에서는 샤토 라그랑주와 샤토 그뤼오 라로즈 등 여러 유명한 와이너리를 방문했습니다.
샤토 라그랑쥬는 보르도에서 유일한 외국 자본입니다. 1631년 중세 시대부터 이어온 와인으로 전통적인 방식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일본 산토리에 와이너리를 넘겼다고 합니다. 산토리는 13년 동안 구매가의 10배를 투자한 끝에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샤토 그뤼오 라로즈는 생 줄리앙에 있는 샤토입니다. 30만 병을 생산하면서도 좋은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하나 창고에 보관되고 있는 대량의 오크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 행사를 돌아가면서 진행해 다양한 샤토의 와인을 잠깐 보관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특별하게 오래된 와인을 보관하는 곳도 따로 있는데 내가 태어난 해의 빈티지 와인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제일 오래된 1800년대 와인도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포도밭 전경이 멋졌습니다. 특히 샤토 그뤼오 라로즈는 현대 미술관처럼 세련된 인테리어였습니다. 와인 판매 말고도 보는 즐거움이 있는 멋진 정원이었습니다.
전통과 변화의 딜레마
보르도는 와인으로 시작해 와인으로 끝나는 도시였습니다. 포도 재배업자 12,000명, 네고씨앙 400 업체, 와인 중개인 130 업체로 와인 관련 종사자가 60,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6명 중 1명은 와인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라 합니다. 정부가 제어하는 엄격한 품질 관리에 맞춰 포도 재배 업자가 포도를 키워 와인을 만들고, 와인이 오크통에서 1년 정도 숙성된 상태인 ‘앙 쁘리뫼르’를 네고씨앙이 대량으로 미리 구매합니다. 잘 숙성된 와인은 이제 중개인이 전통적으로 와인을 많이 마시는 유럽 전역에 퍼집니다.
와인은 신대륙 와인과 구대륙 와인으로 나뉩니다. 와인은 동유럽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처음 만들어져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이때부터 최소 2천 년 동안 와인을 만든 곳을 ‘구대륙 와인’이라 부릅니다. 이외의 지역은 ‘신대륙 와인’이라 부르며 미국, 칠레, 호주 등으로 약 몇백 년 전부터 만들어온 지역입니다. 신대륙은 규제로부터 자유로워 자유로운 실험으로 좋은 맛을 내는 와인 제조법을 개발했습니다. 브랜드명보다 포도 품종을 강조하고 포도원을 관광지로 바꿨습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맛을 내다보니 사람들은 신대륙 와인에 열광했습니다. 런던 국제 와인 거래소 리벡스(Liv-ex) 점유율이 95%에서 58%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구대륙에서도 이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양한 포도원이 나눠어 있어 시장을 지배하는 단 1개가 나올 수 없어 규모의 경제를 만들 수도 없고 규제가 발목을 잡아, 새로운 맛을 만들기 어렵고 등급제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브랜드 간의 우열과 희소성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생산성을 높이려면 전통을 지킬 수 없어 실행이 불가능해 이도저도 못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자신들만의 확실한 성공 전략으로 누구도 진입할 수 없는 압도적인 지위를 가졌지만,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가치인 ‘맛’이 따라잡히니 독점적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보르도라는 도시가 마치 과거에 성공했지만 몰락해가는 IT 서비스 회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안전한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고객과 가치에 끊임없이 집착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내가 해봤던 익숙하고 안전한 상태를 넘어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네요.
넓게 펼쳐진 밭과 장엄한 성, 와인이 담긴 오크통과 200년이 넘은 빈티지 와인들은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매력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전통과 시간을 담은 보르도의 경관이 아름다웠습니다. 앞으로 보르도는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요. 저렴한 가격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제공할 수 없다면, 특별한 순간을 위한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로써 럭셔리를 제공하는 것에 돌파구가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