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시간을 담은 도시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보르도 Bordeaux로 떠났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보르도가 프랑스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어렴풋이 와인의 도시로만 알았습니다. 보르도는 프랑스 남서쪽에 있는 항구 도시로 도시 모양이 초승달을 닮아 달의 항구 Port de la lune 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스페인 피레네 산맥에서부터 대서양까지 흐르는 가론 강 La Garonne와 우아한 팔레 드 라 부르스 Palais de le Bourse의 물의 거울 Mirroir d’Eau이 유명하죠. 와인을 잘 먹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파리 이외의 도시를 경험해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도시인 파리와 다르게 넓게 펼쳐진 포도밭과 따듯한 햇살을 상상하며 설렜습니다.

보르도 Saint-Jean 역

48년동안 시장이었던 작크 샤방 델마

숙소로 이동하는 트램에서 현지인을 만났는데 왜 보르도에 사냐 물었더니 시크한 파리와 다르게 사람들이 여유로운 미소를 띤다고 했습니다. 보르도는 길이 넓고 담배나 대마 냄새가 없었습니다. 늦은 밤인데도 공원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평화롭게 놀고 있어서 오 안전한데…?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독특한 형태의 보르도 법원 건물
옛 공장을 개조해 만든 복합 문화 공간, 다윈 에코 시스템

첫날은 자전거 투어를 했습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단체로 진행하는 투어였는데 간단한 설명을 들으며 도시 전체의 윤곽을 빠르게 훑었습니다. 보르도는 로마, 프랑스, 영국 등 다양한 나라의 지배를 받았었다고 합니다. 로마 시대 콜로세움과 영국풍 공원, 프랑스 성당 등 세계의 거대한 흐름을 주도했던 프랑스와 영국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국이 지배하던 11세기~13세기까지 포도주, 의류, 밀 등을 수출입 했고 프랑스가 지배한 17~18세기에 식민지인 아프리카, 서인도 제도의 물자와 노예무역으로 큰 항구 도시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상업적 감각이 탁월했던 영국과 최고급 포도를 키울 수 있는 프랑스가 결합되어 전 세계에 최고급 와인을 퍼뜨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탑의 꼭대기
로마 시대 콜로세움의 흔적

프랑스가 타국의 주요 인사와 결혼식을 열 때, 파리는 너무 프랑스 중심이니 살짝 다른 나라에 가까운 보르도에서 결혼식을 연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여러모로 보르도는 와인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세계의 질서를 주도하던 시기에 두 나라의 사이에 독특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인이 태어나는 품, 떼루와

떼루와 Terroir 는 프랑스어로 토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포도가 자라는 데 영향을 주는 지리, 기후, 재배법 등 모든 것을 아울러 표현하는 말입니다. 유럽에서는 동일한 포도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도 어떤 자연환경에서 만들고 키우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와인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땅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와인 이름에 지역 이름이 붙는 것이죠. 보르도는 바다에 닿은 큰 강인 지롱드 Gironde와 가론 Garonne 강, 도르도뉴 Dordogne을 중심으로 지역을 구분합니다. 강을 기준으로 왼쪽을 좌안 Left bank, 오른쪽을 우안 Right bank이라 부릅니다. 좌안은 북쪽의 메독 Medoc이 유명하고 우안은 생테밀리옹 Saint Emilion이 유명합니다.

와이너리 풍경
와인의 맛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요소들
보르도 와인 지역 구분

보르도에서는 9월 초에 한 달 사이 포도를 수확합니다. 설익으면 당분이 낮아 신맛이 강해지고 바디감이 옅어지고, 너무 익으면 당도가 높아 신맛과 향을 잃습니다. 좌안은 바위, 자갈이 많아 배수가 잘되고 온도를 잘 간직해 까베르네 쇼비뇽을 재배하기 좋습니다. 타닌, 알코올, 산도가 높은 장기 숙성할 수 있는 고급 와인을 만들기 좋습니다. 우안은 진흙이 많아 비옥해 토질에 예민한 메를로를 재배하기 좋습니다. 타닌, 알코올, 산도가 낮아 부드러운 와인을 만듭니다. 보르도는 브루고뉴와 다르게 포도 품종을 섞어 와인을 만들며 좌안은 카베르네 소비뇽을 중심으로 메를로 Merlot, 카베르네 프랑, 쁘띠 베르도, 말벡을 섞고 우안은 메를로 기반으로 나머지를 블렌딩하는 편입니다.

엄격한 규칙

와인은 라벨 명에 따라 판매량이 크게 좌우되는데 인증받은 이름을 쓰기 위해서는 AOC (Appellation Bordeaux Controlee)라는 철저한 기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포도밭 1 헥타르에 포도 나무를 몇 그루 이상 심으면 안 되고, 몇백 리터 이상을 생산해도 안 되며, 알코올 도수는 최소 얼마를 넘어야 하고, 산화 방지를 위한 SO2는 리터 당 몇 밀리그람 써야 하고, 옆집 포도를 섞어도 안 되고 병을 다른 지역에서 사도 안 되고, 일찍 포도를 수확해도 안 됩니다. 공식 전문가가 수확 날짜를 정해 공지하고 그날 이후로 괜찮은 비오지 않는 날을 고른다고 합니다. 엄격하고 철저한 중앙 통제 방식이죠.

양조장

또 등급제도 엄격합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전 세계에 보르도 와인을 홍보하기 위해 도입했습니다. 그랑 크뤼 클라쎄라고 불리며 뛰어난 포도원이라는 의미의 그랑 크뤼, 등급이라는 의미의 클라쎄가 합쳐진 말입니다. 와인 가격, 샤토 토질, 지명도 등을 바탕으로 비싼 순으로 등급을 지정했습니다. 5개 등급으로 나뉘고 지금까지도 세습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안은 1955년에 도입되어 10년마다 갱신되는 생테밀리옹 분류 St-Emilion Classification이 있습니다. 그랑 크뤼 클라쎄 A, 그랑 크뤼 클라쎄 B, 그랑 크뤼 클라쎄로 3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단 등급제는 오래된 기준으로 나뉘기도 했고 단순히 유명하기만 하면 높은 등급으로 친 경향이 있습니다. 몇몇 유명한 샤토는 이 등급 심사를 받지 않겠다고 해 의미가 많이 바랐다고 합니다.

우안의 생떼밀리옹 Saint Emilion

보르도에서 귀여운 피아트 차를 몰고 1시간 정도 달려 생떼밀리옹에 갔습니다. 오래된 종탑이 높게 솟아있고 노란 벽돌로 가득한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종탑을 타고 올라가면 마을의 전체 모습과 넓게 펼쳐진 포도밭을 볼 수 있습니다. 8세기 브르타뉴 지방 에밀리옹 Emilion 수도사가 성지를 순례하다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마을입니다. 프랑스 왕비였다 영국 왕비가 된 알리에노리 다키텐 때문에 마을의 소유권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수없이 전쟁을 치렀고 백년 전쟁이 끝나고 완전히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당시 모습을 유지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마을입니다.

생떼밀리옹 언덕 길
생떼밀리옹 전경

따듯한 햇살과 노란 벽돌이 잘 어울리는 투박하면서 정겨운 풍경의 마을이었습니다. 중세 시대부터 이어온 마을의 형태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생각이 드는 마을이었습니다. 대도시의 섬세한 건축물과 다르게 표면에 거친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어떤 기둥은 정말 무게를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모되어 지난 시간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당 기둥
종탑에서 바라본 마을
모놀리트 성당

온화한 대서양의 바람, 풍부한 일조량, 배수가 잘되는 흙을 바탕으로 메를로 Merlot과 까베르네 프랑 Cabernet Franc 포도 품종을 재배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떼밀리옹만의 와인을 만든다고 합니다. 자체적인 체계가 있어 포도주의 등급도 매긴다고 하네요. 외국인이 안동 하회 마을을 오면 이런 인상을 받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좌안의 메독 Medoc

가론 강의 왼쪽의 메독을 투어했습니다. 가이드 분의 차를 타고 편하게 둘러보았습니다. 보르도하면 떠오르는 넓은 포도밭과 멋진 저택을 보러 떠났습니다. 샤토는 성 대저택이란 프랑스어로 포도원에 있는 저택, 양조장, 포도밭까지 함께 지칭하는 말로 포도 양조, 병입, 출하를 모두 하는 와이너리를 말합니다. 좌안에서는 샤토 라그랑주와 샤토 그뤼오 라로즈 등 여러 유명한 와이너리를 방문했습니다.

지나는 길에 발견한 와이너리
샤토 마고
샤토 라그랑쥬
샤토 라그랑쥬

샤토 라그랑쥬는 보르도에서 유일한 외국 자본입니다. 1631년 중세 시대부터 이어온 와인으로 전통적인 방식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일본 산토리에 와이너리를 넘겼다고 합니다. 산토리는 13년 동안 구매가의 10배를 투자한 끝에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샤토 그뤼오 라로즈는 생 줄리앙에 있는 샤토입니다. 30만 병을 생산하면서도 좋은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샤토 그뤼오 라로즈
샤토 그뤼오 라로즈에서 가장 오래동안 보관한 와인
지나는 길에 발견한 와이너리 3

지하나 창고에 보관되고 있는 대량의 오크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 행사를 돌아가면서 진행해 다양한 샤토의 와인을 잠깐 보관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특별하게 오래된 와인을 보관하는 곳도 따로 있는데 내가 태어난 해의 빈티지 와인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제일 오래된 1800년대 와인도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포도밭 전경이 멋졌습니다. 특히 샤토 그뤼오 라로즈는 현대 미술관처럼 세련된 인테리어였습니다. 와인 판매 말고도 보는 즐거움이 있는 멋진 정원이었습니다.

전통과 변화의 딜레마

보르도는 와인으로 시작해 와인으로 끝나는 도시였습니다. 포도 재배업자 12,000명, 네고씨앙 400 업체, 와인 중개인 130 업체로 와인 관련 종사자가 60,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6명 중 1명은 와인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라 합니다. 정부가 제어하는 엄격한 품질 관리에 맞춰 포도 재배 업자가 포도를 키워 와인을 만들고, 와인이 오크통에서 1년 정도 숙성된 상태인 ‘앙 쁘리뫼르’를 네고씨앙이 대량으로 미리 구매합니다. 잘 숙성된 와인은 이제 중개인이 전통적으로 와인을 많이 마시는 유럽 전역에 퍼집니다.

루이비통에서 운영하는 와인샵

와인은 신대륙 와인과 구대륙 와인으로 나뉩니다. 와인은 동유럽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처음 만들어져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이때부터 최소 2천 년 동안 와인을 만든 곳을 ‘구대륙 와인’이라 부릅니다. 이외의 지역은 ‘신대륙 와인’이라 부르며 미국, 칠레, 호주 등으로 약 몇백 년 전부터 만들어온 지역입니다. 신대륙은 규제로부터 자유로워 자유로운 실험으로 좋은 맛을 내는 와인 제조법을 개발했습니다. 브랜드명보다 포도 품종을 강조하고 포도원을 관광지로 바꿨습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맛을 내다보니 사람들은 신대륙 와인에 열광했습니다. 런던 국제 와인 거래소 리벡스(Liv-ex) 점유율이 95%에서 58%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다양한 포도 품종

구대륙에서도 이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양한 포도원이 나눠어 있어 시장을 지배하는 단 1개가 나올 수 없어 규모의 경제를 만들 수도 없고 규제가 발목을 잡아, 새로운 맛을 만들기 어렵고 등급제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브랜드 간의 우열과 희소성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생산성을 높이려면 전통을 지킬 수 없어 실행이 불가능해 이도저도 못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자신들만의 확실한 성공 전략으로 누구도 진입할 수 없는 압도적인 지위를 가졌지만,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가치인 ‘맛’이 따라잡히니 독점적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보르도라는 도시가 마치 과거에 성공했지만 몰락해가는 IT 서비스 회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안전한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고객과 가치에 끊임없이 집착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내가 해봤던 익숙하고 안전한 상태를 넘어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네요.

샤토의 중심 건물

넓게 펼쳐진 밭과 장엄한 성, 와인이 담긴 오크통과 200년이 넘은 빈티지 와인들은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매력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전통과 시간을 담은 보르도의 경관이 아름다웠습니다. 앞으로 보르도는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요. 저렴한 가격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제공할 수 없다면, 특별한 순간을 위한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로써 럭셔리를 제공하는 것에 돌파구가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파리, 다시 만난 여행 14번째 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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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여행을 왔습니다. 파리는 8년 만이에요. 오랜만에 떠나는 장거리 여행은 준비할 것이 많았습니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비행은 역시 피곤하네요. 파리는 여름 초입으로 하늘이 넓고 높아 날이 화창합니다. 예전에 파리에 왔을 때는 겨울이었는데 이번에는 맑은 햇살이 내리쬐네요. 그동안의 고된 시간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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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잔뜩 긴장하다가 도착했더니 완전히 긴장이 풀렸습니다. 호텔 지하에 있는 파리답다는 생각이 드는 아름다운 디자인의 개인 수영장과 사우나에서 피로를 씻었습니다. 식사를 하러 골목에 나서자 파리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이 났습니다. 곳곳에서 확 올라오는 대마 냄새조차도 반가웠네요. 오랫동안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에 방문할 곳을 자세히 정하진 않았습니다. 전날 혹은 그날 아침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더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네요.

오래된 곳과 새로운 곳

예전에 파리를 왔을 때는 예술적 영감을 받고 싶어 멋진 박물관을 봤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한 박물관이나 관광 명소를 듬뿍 경험했습니다. 파리의 역사는 충분히 즐긴 것 같으니 이번에는 지역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파리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로 떠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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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오래된 곳은 방브 벼룩시장이었습니다. 방브 벼룩시장은 주말 아침에 잠깐 열리고 점심쯤 닫는 앤티크 벼룩시장입니다. 이전에 생투앙 벼룩시장도 다녀왔지만 방브 벼룩 시장이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생투앙은 큰 가구와 그림이 잘 짜여진 가게 안에 진열되었습니다. 반면 방브 벼룩 시장은 정말 금방이라도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을 먼지를 털어 꺼내 놓은 것처럼 가까웠습니다. 티 세트, 카메라, 작은 그림 등 여행이 끝나고 손쉽게 들고 가기 좋은 적당한 크기의 소품이 많았습니다. 형태는 한국의 벼룩시장과 비슷했지만 물건의 종류나 다양성이 달랐습니다. 아주 오래된 시절부터 사용하던 물건들에서 묘한 가까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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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러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빈티지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간직한 물건을 찾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술과 시간이 있다고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겠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사람들이 쓰기 좋고 아름다운 물건인지 깊게 고민한 결과물이 투영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사람의 마음에 집중해야 오래가고 기억에 남는 디자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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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새로운 곳은 사마리탄 백화점이었습니다. 퐁네프 다리 근처에서 1868년부터 운영했지만 2005년 건물 구조물 진단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강제로 문을 닫았어야 했습니다. 공사는 무려 16년이나 걸렸고 건물을 다 완성한 이후에 내부 인테리어를 완성하는데 2년이 걸렸다고 하네요. 럭셔리 호텔 슈발 블랑, 사무실, 공동 주택, 어린이집 등 물건을 파는 공간 외에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도 제공하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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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아함이란 지키고자 하는 고결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르데코 양식의 계단은 푸른 회색과 1만 6,000개의 반짝이는 금박 잎으로 장식했습니다. 가장 높은 층에 도착하면 섬세하게 그린 아름다운 공작새 프레스코 벽화가 온 공간에 가득합니다. 건물 전체가 조각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파리지앵들에게 거대한 신식 백화점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로지 효율과 판매만을 위한 공간으로 설계하기보다 헤리티지를 지키면서 새로움을 표현한 것이 멋졌습니다.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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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흐르다 거대한 나무가 중앙에 아름드리 서 있는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산들바람이 잔잔히 불고 잎사귀가 흩날리는 광장 구석에는 작은 향신료 가게가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공간에는 산책 나온 동네 주민들이 가득했고, 중앙에는 작은 캔에 소금이 만들어진 곳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여러 지역의 향신료를 경험하며 새로운 요리를 만들 것을 상상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리에는 작은 가게가 많습니다. 빵, 디저트, 잼, 향신료, 옷, 소품 등 작은 것을 파는 가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냥 ‘오리’인 것들을 잔뜩 모은 가게를 찾았을 때는 웃음이 번졌습니다. 새로운 골목을 들어설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가게가 있을까 두근거리며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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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하면 역시 음식이라 다양한 미식을 찾았습니다. 피에르 에르메의 이스파한과 2000밀푀유, 사크레 쾨르 근처 Pain Pain의 풍성한 빵, 에끌레어 여기저기 맛있다고 하던 곳들만 표시해도 100개가 넘어서 어딜 가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La Maison Fou de Pâtisserie 였습니다. 첫 시작은 페스트리 셰프의 세계를 소개하기 위해 만든 잡지였습니다. 격월로 발행한 잡지가 큰 성공을 거둔 뒤, 이들은 이 경험을 실제 공간으로 옮겨오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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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전통적인 브랜드 상점과 완전히 다른 방식을 취했고 가장 유명한 파리지앵 페이스트리가 모여 있습니다. 안젤리나의 몽블랑, 피에르 에르메의 마카롱, 휴고 앤 빅터의 과일 타르트 등 특별한 디저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종이 잡지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장인이 자신만의 가게를 만드는 것이 당연한 파리에서 돋보이는 시도이고 디저트를 사랑하는 사람이 파리의 독창적인 디저트를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멋졌습니다.

다양한 책이 모여 있는 곳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잡지, 신간 서적, 베스트셀러를 보면 그 지역의 사람들이 어떤 것에 집중하는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출판사가 운영하는 서점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는데 오랜 역사를 가진 아트북 출판사의 공간은 압도적인 인상이었습니다. 타셴의 놀라운 아이디어, 애슐린의 색감, OFR의 날 것이 멋졌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이본 랑베르 북샵이었습니다. 이본 랑베르는 혁신적인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갤러리스트로 유명합니다. 다양한 예술가를 프랑스에 소개한 랑베르는 갤러리 옆에 아트북샵을 열어 출판물, 인쇄물, 예술 서적, 예술가의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행사를 주최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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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우연히 한국 점원분을 만났고 뒤편에 있는 작은 공간의 현대적인 컨셉의 사진전을 소개받았습니다.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멋진 할아버지가 다가왔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 물었고 우리는 한국에서 왔고 멋진 전시인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알고 보니 멋진 할아버지는 전시 작가분이셨고 잡지사 인터뷰 및 촬영을 위해 방문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본 랑베르가 결코 작은 이름이 아니지만, 동시대 살아 숨 쉬는 예술을 소개하는 작은 서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작가, 사람들에게 알리는 잡지사까지 한 곳에서 만나니 파리가 예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타오르는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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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위한 냉정한 마음과 과열된 생각에서 벗어나, 삶과 일에 대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서의 일은 보통 문제 해결이 목표입니다. 모든 현상을 문제, 해결, 증명으로 치환해 효과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IT 서비스를 하는 회사의 디자이너로서 활동하면서는 주로 불편함을 해결하거나 제품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 또한 멋진 일이었지만 마음 어딘가에서는 항상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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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러운 영감이 넘치는 공간, 우아함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들이는 여유,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기회. 파리라는 도시는 즐거운 관광 이상이었습니다. 내게 중요한 가치를 지키고 꾸준히 사랑하는 것에 애정을 쏟는 것. 남들이 말하는 멋짐을 따르기보다 나만의 좋음을 따르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짧은 삶 속에 더 많은 것을 풍성하고 밀도 있게 경험하고 내가 사랑하는 디자인이 더 성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적당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법이 아니라 정말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멋짐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