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여행자를 위한 문화 퍼즐

동남아 한 달 여행을 떠나며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쿠알라룸푸르였습니다. 이번 여행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를 순서대로 거치는 일정이었기에, 동선에 맞춰 첫 목적지로 말레이시아를 선택했습니다. 사실 말레이시아라는 나라 자체도 생소했고, 쿠알라룸푸르라는 도시 역시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유튜브에서 “가성비 여행지”, “저렴한 물가로 호캉스 즐기기”, “반값 호텔에서 수영하기” 같은 콘텐츠를 자주 보며 막연한 이미지만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와 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물가가 저렴하진 않아 약간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화려한 빌딩이 가득한 대도시 한가운데에서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 언어가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뒤섞여 살아가는 풍경은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도시의 화려함 속에 다층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특별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흙탕물이 모이는 곳

쿠알라룸푸르는 이름 그대로 “흙탕물이 합류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입니다. 두 강이 만나 하나로 섞이듯,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 이민자들, 영국 식민 시절 유입된 인도계 저임금 노동자(쿨리), 그리고 이 땅의 원주민 말레이계가 겹겹이 쌓이며 도시의 역사가 형성되었습니다.

주석 광산으로 출발한 이 도시는 상공업을 중심으로 한 중국계, 행정·경찰·군의 하층 구조를 담당한 말레이계, 운수·택시 산업이 집중된 인도계라는 사회적 배치 위에서 다인종·다문화·다종교의 거대한 용광로로 발전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말레이 이슬람이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미국식 계획 도시를 닮은 넓은 도로와 녹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건설했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자신감과 야망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한국처럼 단일 민족 국가에 익숙하다 보니 처음에는 말레이시아가 말레이 민족만의 나라라고 생각했지만, 실제의 KL은 서로 다른 문화와 신앙, 언어가 충돌하고 어우러지며 새로운 “말레이시안”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거대한 실험장이었습니다.

동남아의 이슬람

이슬람이라고 하면 흔히 사막과 중동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쿠알라룸푸르는 전혀 다른 얼굴의 이슬람을 보여줍니다. 열대의 습한 공기 속에서 만나는 이슬람은 거칠기보다 세련된 인상을 주며, 종교라기보다 도시의 리듬처럼 자연스럽게 스며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이 주류가 된 과정 역시 정복이 아니라 무역과 정치의 선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레이 반도에 무슬림 상인들이 정착하며 신앙이 평화롭게 확산되었고, 15세기 말라카 술탄국이 이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국가 운영과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미 지배적인 종교 체계를 갖고 있던 태국과 베트남과 달리, 말라카의 선택은 말레이시아를 이슬람 국가로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마주하는 비주얼 또한 인상적입니다. 중국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겹쳐 만들어낸 아트워크는 낯설면서도 조화롭고, 보석처럼 화려하게 장식하기보다 형태와 구조를 강조하는 미감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한 박물관 1층에 자리한 레스토랑은 공간 자체가 하나의 전시처럼 아름다워, 쿠알라룸푸르라는 도시가 지닌 이슬람의 결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퍼즐 같이 결합된 문화

쿠알라룸푸르는 특이하게도 민족별로 생활권이 또렷하게 나뉘어 있는 도시입니다.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가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건물의 형태부터 사람들의 분위기, 가게와 간판의 언어까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덕분에 한 도시를 걷고 있음에도 여러 나라를 연속해서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지역마다 종교 역시 달라 성당, 불교 사원, 힌두 사원 등 개성이 강한 종교 건축물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며, 모스크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 차이나타운의 사원, 힌두 사원의 강렬한 색채는 서로 전혀 다른 세계처럼 다가옵니다.

이러한 구조의 배경에는 말레이시아 헌법이 규정한 독특한 정체성이 있습니다. 헌법 제160조에 따르면 말레이인은 이슬람을 믿고 말레이어를 사용하는 원주민 집단으로 정의되며, 말레이인이라는 정체성과 이슬람은 법적으로도 강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정치와 헌법, 문화는 말레이계와 이슬람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고, 경제와 상업에서는 중국계의 영향력이 크며, 학문과 전문직 영역에서는 중국계와 인도계의 비중이 높습니다. 이러한 미묘한 균형 속에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는 1Malaysia와 같은 다민족 공존 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결과 쿠알라룸푸르는 퍼즐처럼 결합된 다층적인 문화를 지닌 도시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행자를 위한 문화 패키지

쿠알라룸푸르는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조건들을 과하지 않게 갖춘 도시입니다. 잘 정비된 인프라 위에 수영장이 딸린 리조트가 일상처럼 자리하고, 전반적인 물가는 부담 없이 머물기 좋습니다. 이동은 편리하고 결제 환경도 익숙해 여행 내내 스트레스를 느낄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전 세계의 문화가 한곳에 뒤섞이기보다 각자의 형태를 유지한 채 독립적으로 모여 있다는 점입니다. 이슬람, 중국, 인도 문화가 만들어낸 다양한 건축물과 생활 풍경을 짧은 동선 안에서 모두 경험할 수 있어, 여러 문화권을 한 번에 여행하는 듯한 밀도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쿠알라룸푸르는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충분히 풍부한 도시입니다.

이번 여행이 도시와 문화의 결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다면, 다음에는 가족과 함께 이 도시의 속도를 더 느리게 즐기고 싶습니다. 쿠알라룸푸르는 혼자서도 좋지만, 함께일 때 더 많은 장면을 남길 수 있는 여행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종민
프리랜서에서 유니콘급 스타트업 헤드 오브 디자인까지. 18년 넘게 브랜드와 프로덕트를 디자인하며 임팩트를 만들어 왔습니다. 현재는 디자인 나침반 CEO이자 편집장으로서 비즈니스 임팩트를 내는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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