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표준 따윈 없는 자유

런던에서 베를린으로 넘어 왔는데 영국이 브렉시트하는 바람에 입국 심사가 추가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비행한 시간보다 여권 검사 시간이 길어서 곤혹을 치뤘습니다. 가급적 런던에서 다른 EU로 넘어가지 않으시길 추천합니다. 감정이 좋지 않아서였는지 왠지 브란덴부르크 공항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갈색 안내판과 알록달록 꾸며진 곰이 미워 보였네요.

베를린은 10년 전에 방문했습니다. 순수 예술에 대한 열정이 뜨거울 때 창의적인 아티스트들이 많고 테크노 음악이 훌륭하다고 해서 제법 긴 시간 머물렀습니다. 당시에는 정보를 얻기 어려워서 뭐가 뭔지 몰랐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숨겨진 매력까지 잔뜩 찾았습니다.

오랫만에 방문하니 살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세가 다른 도시에 비해 저렴하고 자전거만 있으면 어디든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런던의 강력한 물가를 경험하고 나서 그런지 마트 물가가 정말 저렴해서 행복했습니다. 음식 종류도 훨씬 다양했구요. 지역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고 공원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서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도시는 세련되게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투박한 자유로움이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직사각형 보석 상자

온통 직각입니다. 수직으로 높은 직사각형 창문과 수평으로 넓은 직사각형 건물이 많습니다. 온갖 요소가 장식이나 곡선 없이 뻗어 있어서 직사각형 프랙탈 같았습니다. 길이 넓고 건물이 큼직해서 인도, 자전거 도로, 차량 도로 모두 넓고 건물의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커다래서 마치 거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건축물의 입면에 장식이 거의 없습니다. 최소한의 골격만 있고 장식적인 요소가 철저하게 배제되었습니다. 옆면은 아예 아무 것도 없는 콘크리트 평면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기둥이나 받침에 쓰인 돌의 크기가 정말 큽니다. 표면이나 연결 부위를 다듬지 않아 거친 느낌이 듭니다. 마치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를 레이저로 잘라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백화점인 카데베조차도 그다지 꾸미지 않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직사각형 건물 안에는 안뜰이 숨어 있습니다. 가게는 포스터나 간판을 내세우지 않아서 어디에 있는지 어떤 가게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습니다. 옅은 밀도로 넓게 펼쳐졌고 숨겨진 가게가 많아서 공백 속에서 숨겨진 보석을 찾아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중정에 들어설 때마다 마치 상자를 하나씩 여는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중정은 하케쉐 훼페로 독일어로 훼페는 정원을 뜻합니다. 여러 건물이 이어져 하나의 공간을 이룹니다. 특색 있는 가게가 한곳에 모였는데 프랜차이즈가 거의 보이지 않아서 놀랐습니다.

숙소 근처 도서관
숙소 근처 아파트
카데베 백화점
하케쉐 훼페
하케쉐 훼페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타일 가게 ‘골렘’
갤러리가 숨겨진 중정
부스토어

바우하우스 미학

도시 곳곳에서 바우하우스의 미감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건물마다 볼 수 있는 불투명한 플라스틱 조명의 노란 불빛이 매력적입니다. 내부 벽면에는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타일을 많이 쓰는데 지하철은 극단적으로 장식을 쓰지 않습니다. 안내 표시판도 수가 적어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기도 했습니다. 기능을 위해 정말 꼭 필요한 것만 남겼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너무 아무것도 없어서 여백이 아닌 공백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온통 직사각형인 건물 중에서도 유독 아름다운 대비가 느껴지는 건축물이 보였습니다. 웅장한 베를린 국회 의사당 옆에 있는 독일 연방 의회의 폴 뢰베 하우스는 마치 바우하우스의 편집 디자인이 현실에 등장한 것 같았습니다. 독일의 건축가 슈테판 브라운펠스는 유리와 강철로 투명하게 개방된 건축을 설계했습니다. 넓은 사각 면과 얇은 지붕은 마치 괘선처럼 보였습니다.

독일 건축의 전설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1968년 완공한 ‘뉴 내셔널 갤러리’는 유리와 철강으로만 이뤄진 멋진 공간입니다. 생각보다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큰데 공간 내부는 기둥이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유리가 투명하게 비쳐 거대한 직사각형 지붕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철강과 유리만으로 만든 격자 구조에서 극단적으로 간결한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베를린을 추억할 만한 작은 소품을 사고 싶었는데 의외로 마음에 드는 독일 제품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바우하우스 아카이브가 새롭게 단장 중이라 임시로 열린 바우하우스 샵에 방문했는데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샵에는 바우하우스 자체 제품뿐만 아니라 정신을 계승한 다양한 디자이너의 제품도 판매했습니다. 독일 제품은 아니지만 바우하우스만의 독특한 기하학적 미감이 듬뿍 담긴 소금통과 후추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 대기 공간
독일 연방 의회
신 내셔널 갤러리
신 내셔널 갤러리
바우하우스 샵
바우하우스 샵

베를린 빈티지

그냥 빈티지가 아니라 베를린 빈티지였습니다. 제대로 들여다보기 전에는 지저분한 그래피티만 알았는데 이조차도 여러 스타일 중 하나였습니다. 힘주어 꾸미지 않지만, 자신만의 미학을 담은 공간이 많았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빈티지만 모은 가게, 이제는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예술가를 위한 술 압생트 주점, 가죽으로 만든 벨트만 모아서 파는 가게, 미드 센츄리 모던의 감성이 듬뿍 담긴 조명 가게 등 이걸 사 주는 사람들이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자기 개성이 강렬했습니다. 어딘가 조형적으로 어설픈 면이 있어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동독의 향수가 느껴지는 여러 요소가 베를린 빈티지 감성을 더했습니다. 통일 이후 동독과 서독의 보이지 않는 차이 때문에 여전히 동독에 관한 향수가 남은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마우어 파크 근처에 있는 VEBorange에서 동독 시절에 사용하던 오래된 제품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이름답게 주황색 제품이 한가득인데 그 시대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던 중채도 플라스틱 제품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근처에 있는 1913년에 지어진 폭스뷔네(인민극장)와 1929년 개관한 바빌론 영화관은 누가 봐도 사회주의 국가의 건물답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직선이 강조된 외관과 화려한 아르데코 양식의 내부로 유명한데 여전히 다양한 문화 행사와 상영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동독을 상징하는 유명한 상징 암펠만 신호등은 실제로 보니 기능적이면서 심미적이었습니다. 예전에 보았을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실제로 길을 건널 때 자세히 관찰하니 묘사가 많은 새로운 신호등보다 형태가 단순해서 시인성이 좋았습니다. 지루하게 색으로만 구분하지 않고 사람이 멈추고 건너는 걷는 의미까지 그래픽으로 잘 표현해서 멋진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것에 의미를 담아 남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브랜드 디자인에서 참고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빈티지 샵
작은 선물 가게
빈티지 조명 가게
VEBorange
VEBorange
VEBorange
암펠만 숍

힙스터의 도시 베를린

여행하기 전 베를린은 혼란스럽게 자유로운 곳이라는 이미지였습니다. 새까만 옷을 입고 테크노를 즐기면서 아무 곳에서나 술을 먹고 그래피티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이것도 맞지만) 이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긴 풍성한 도시였습니다.

요즘은 단순히 유행을 선도하는 멋진 것에 ‘힙’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힙스터란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다 보니 주류와 구분되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베를리너는 유행을 따른 소비를 절제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투자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모습이 베를리너야말로 진정한 힙스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종, 성별, 나이를 그다지 구분하지 않고 타인이 무엇을 하던 관심 없는 모습은 어찌 보면 무심해 보이지만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지하철 내부에 있는 간판도 왠지 역을 짓고 남는 자재로 만든 것 같은 베를린. 다시 방문한다면 테크노 클럽을 즐겨보고 싶네요.

베를린 역 간판
베를린 역 간판
베를린 역 간판 모음
안경 가게 간판
안드레아스 무르쿠디스
카데베 앞 역사
빈티지 자동차
빈티지 자동차
빈티지 자동차
악기 박물관
악기 박물관
베를린 텔레비전 타워
베를린 텔레비전 타워
구 박물관
베를린 돔
왠지 베를린스러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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