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빛 바랜 색감과 부드러운 마감

런던에 도착하고 처음 본 것은 회색빛 하늘이었습니다. 물 빠진 색감의 광경은 카메라에 필터를 끼운 것 같았습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이동하는 길에는 드넓은 평야와 정말 많은 붉은 벽돌집이 보였습니다.

언덕이 없는 평지라 걷기 좋았습니다. 유일하게 고통스러웠던 길은 지하철 계단이었습니다. 리프트가 없는 오래된 역도 있어 잘 골라 타야 했습니다. 언덕이라고 부르는 프림로즈 힐은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낮았습니다.

비접촉 카드 사용 환경이 잘 갖춰져 있어서 마치 서울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규모 있는 가게는 직접 카드로 계산할 수 있는 키오스크가 엄청 많아서 빠르게 계산하기 좋았습니다. 한국에서 쓰던 신용카드를 그대로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학생 시절 영국은 디자인의 시작인 윌리엄 모리슨과 수많은 그래픽 디자인의 기원에 관해서만 배우고 도시를 직접 경험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런던만의 역사가 담긴 헤리티지 스타일, 전설적인 도시 그래픽 디자인, 절제된 산업 디자인에서 런던의 미감을 듬뿍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붉은 벽돌

어딜 가나 벽돌 건물입니다. 영국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빅토리안 시대 스타일의 주택이 가득합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벽돌집의 원본이 이거구나 싶었습니다. 물 빠진 색감, 철 구조물이 어우려져 러스틱하고 빈티지한 인상입니다.

골목을 들어설 때마다 완전히 다른 인상의 벽돌 건물이 등장해서 길거리를 배회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회색이나 계란색 벽돌 집도 많았지만 유독 빨간 벽돌이 많은데 이는 스모그가 심해 눈에 띄는 색을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커다란 벽돌 건물을 개조한 공간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배터시 발전소인데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습니다. 규모에 비해서 층수가 낮길래 사무실이 입주했구나 싶었는데 층고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것이었습니다.

화력 발전소 시절에 사용하던 구역의 이름이나 구조물을 승계해 사용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장 전체를 조망했을 컨트롤 룸 공간에 카페가 들어섰습니다. 건축이 기능적 만족을 넘어설 때 이런 독창적인 존재감을 가질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나무와 꽃

런던은 자연의 푸른 풍성함보다 나무나 꽃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집중한 것 같았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간판이나 장식, 식물을 세밀하게 묘사한 벽지가 기억에 남습니다.

여러 건축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150년이 넘은 리버티 백화점입니다. 런던은 대화재로 도시의 4분의 3이 불탄 경험 때문에 불에 취약한 목조형 건축물을 찾기 힘듭니다. 리버티 백화점은 튜더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곳곳에 숨겨진 섬세한 나무 장식이 매력적입니다. 직물을 팔던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다양한 옷감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패턴이 섬세한 벽지도 꽤나 넓은 공간을 할애해 판매합니다. 영국 특유의 꽃무늬부터 동양적인 느낌의 산수화까지 다양한 종류를 둘러보았습니다.

보태니컬 아트의 정점은 하우스 오브 해크니입니다. 잘못 찾았나 착각이 들 정도로 고풍스러운 공간입니다. 젊은 아티스트 부부가 창립한 회사로 인테리어를 위한 다양한 소품과 벽지를 판매합니다. 여느 인테리어 잡지에서만 보던 강렬한 컨셉의 쇼룸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벽지가 실제로는 어떻게 보일지 스크린으로 재현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 찾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도시 한 복판에 이렇게 감도 높은 공간이 유지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공공 디자인

학생 시절부터 익히 들었던 전설적인 공공 디자인을 경험했습니다. 런던 최초의 지하철은 전 세계 교통 디자인의 표준이 되어 너무나 익숙하지만 시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거리에 있는 간판이나 포스터와 구분되는 것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식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기능적인 요소에 집중했습니다.

멀리서도 인지할 수 있는 색, 추상적인 의미를 담은 아이콘, 상황을 묘사하는 일러스트레이션, 회로도를 닮은 지하철 지도에서 정확한 정보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세리프 서체가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데 현대적인 인상의 에드워드 존스턴과 에릭 길의 서체도 잘 어울립니다.

런던을 상징하는 검은 택시와 빨간 버스도 기억에 남습니다. 전통적인 형태를 유지한 디자인은 단정한 수트같이 정돈된 느낌을 줍니다. 영국의 자동차인 미니, 벤틀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두툼한 양감과 완만한 곡선이 매력적입니다.

간결한 도구

생활용품에도 영국의 부드러운 디자인이 느껴집니다. ‘슈퍼 노말’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재스퍼 모리슨의 샵을 방문했는데 역시나 간결한 디자인이었습니다. 스튜디오 옆에 작게 운영하고 있어 찾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방문했을 때 물건의 본질을 포착하는 작은 전시회도 열렸습니다. 재스퍼 모리슨이 슈퍼 노멀하다고 생각하는 제품을 모아뒀는데 하나하나 매력적이었습니다. 결국 너무 마음에 드는 알레시의 에스프레소 잔도 구매했습니다.

레이버 앤 웨이트는 조경을 하거나 캠핑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자주 사용하길래 방문했습니다. 흙을 만진다면 보통 투박하고 거친 도구만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가벼우면서 섬세한 도구가 많았습니다. 괜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반항 정신

펑크 음악으로 접했던 영국의 반항 정신이 여러 공간에서 느껴졌습니다. 컨셉을 살려 강렬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짜릿하게 느꼈습니다.

펑크하면 떠오르는 ‘꼴라쥬‘는 쇼디치와 해크니에서 보았습니다. 시내 중심부에는 온통 무채색의 옷과 다르게 발광하는듯한 색의 옷과 거칠게 찢어진 옷이 가득합니다. 귀족적인 장식과 스포츠의 매끈함이 엉망진창으로 이어 붙여진 것이 묘하게 매력적입니다. 도버 스트릿 마켓의 하이 패션도 런던다웠습니다. 페컴 레벨은 주차장을 개조해 창작자가 지역 시민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공간은 사이버독입니다. 캠던 마켓의 내부에 있는 가게로 세기말 감성의 패션 빈티지 샵입니다. 빠른 비트의 음악은 입구에서부터 어깨를 들썩이게 됩니다. 런던의 흐린 날씨를 꿰뚫어버리는 듯한 형광 네온 컬러가 뿜어져 나옵니다. 취향에 미치면 이 정도는 되야겠구나 싶었습니다.

런던은 여행하기 편하고 즐길거리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음식은 완전 포기했는데 대형 마트인 m&s 푸드홀에서 판매하는 빵과 식사 키트 수준이 높아서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수준이 그렇게 높다는 현대 미술에 집중해 투어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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