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여행을 왔습니다. 파리는 8년 만이에요. 오랜만에 떠나는 장거리 여행은 준비할 것이 많았습니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비행은 역시 피곤하네요. 파리는 여름 초입으로 하늘이 넓고 높아 날이 화창합니다. 예전에 파리에 왔을 때는 겨울이었는데 이번에는 맑은 햇살이 내리쬐네요. 그동안의 고된 시간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잔뜩 긴장하다가 도착했더니 완전히 긴장이 풀렸습니다. 호텔 지하에 있는 파리답다는 생각이 드는 아름다운 디자인의 개인 수영장과 사우나에서 피로를 씻었습니다. 식사를 하러 골목에 나서자 파리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이 났습니다. 곳곳에서 확 올라오는 대마 냄새조차도 반가웠네요. 오랫동안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에 방문할 곳을 자세히 정하진 않았습니다. 전날 혹은 그날 아침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더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네요.
오래된 곳과 새로운 곳
예전에 파리를 왔을 때는 예술적 영감을 받고 싶어 멋진 박물관을 봤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한 박물관이나 관광 명소를 듬뿍 경험했습니다. 파리의 역사는 충분히 즐긴 것 같으니 이번에는 지역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파리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로 떠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오래된 곳은 방브 벼룩시장이었습니다. 방브 벼룩시장은 주말 아침에 잠깐 열리고 점심쯤 닫는 앤티크 벼룩시장입니다. 이전에 생투앙 벼룩시장도 다녀왔지만 방브 벼룩 시장이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생투앙은 큰 가구와 그림이 잘 짜여진 가게 안에 진열되었습니다. 반면 방브 벼룩 시장은 정말 금방이라도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을 먼지를 털어 꺼내 놓은 것처럼 가까웠습니다. 티 세트, 카메라, 작은 그림 등 여행이 끝나고 손쉽게 들고 가기 좋은 적당한 크기의 소품이 많았습니다. 형태는 한국의 벼룩시장과 비슷했지만 물건의 종류나 다양성이 달랐습니다. 아주 오래된 시절부터 사용하던 물건들에서 묘한 가까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풍스러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빈티지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간직한 물건을 찾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술과 시간이 있다고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겠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사람들이 쓰기 좋고 아름다운 물건인지 깊게 고민한 결과물이 투영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사람의 마음에 집중해야 오래가고 기억에 남는 디자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새로운 곳은 사마리탄 백화점이었습니다. 퐁네프 다리 근처에서 1868년부터 운영했지만 2005년 건물 구조물 진단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강제로 문을 닫았어야 했습니다. 공사는 무려 16년이나 걸렸고 건물을 다 완성한 이후에 내부 인테리어를 완성하는데 2년이 걸렸다고 하네요. 럭셔리 호텔 슈발 블랑, 사무실, 공동 주택, 어린이집 등 물건을 파는 공간 외에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도 제공하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우아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아함이란 지키고자 하는 고결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르데코 양식의 계단은 푸른 회색과 1만 6,000개의 반짝이는 금박 잎으로 장식했습니다. 가장 높은 층에 도착하면 섬세하게 그린 아름다운 공작새 프레스코 벽화가 온 공간에 가득합니다. 건물 전체가 조각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파리지앵들에게 거대한 신식 백화점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로지 효율과 판매만을 위한 공간으로 설계하기보다 헤리티지를 지키면서 새로움을 표현한 것이 멋졌습니다.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
이리저리 흐르다 거대한 나무가 중앙에 아름드리 서 있는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산들바람이 잔잔히 불고 잎사귀가 흩날리는 광장 구석에는 작은 향신료 가게가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공간에는 산책 나온 동네 주민들이 가득했고, 중앙에는 작은 캔에 소금이 만들어진 곳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여러 지역의 향신료를 경험하며 새로운 요리를 만들 것을 상상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리에는 작은 가게가 많습니다. 빵, 디저트, 잼, 향신료, 옷, 소품 등 작은 것을 파는 가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냥 ‘오리’인 것들을 잔뜩 모은 가게를 찾았을 때는 웃음이 번졌습니다. 새로운 골목을 들어설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가게가 있을까 두근거리며 걸었습니다.
파리하면 역시 음식이라 다양한 미식을 찾았습니다. 피에르 에르메의 이스파한과 2000밀푀유, 사크레 쾨르 근처 Pain Pain의 풍성한 빵, 에끌레어 여기저기 맛있다고 하던 곳들만 표시해도 100개가 넘어서 어딜 가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La Maison Fou de Pâtisserie 였습니다. 첫 시작은 페스트리 셰프의 세계를 소개하기 위해 만든 잡지였습니다. 격월로 발행한 잡지가 큰 성공을 거둔 뒤, 이들은 이 경험을 실제 공간으로 옮겨오기로 했습니다.
이 곳은 전통적인 브랜드 상점과 완전히 다른 방식을 취했고 가장 유명한 파리지앵 페이스트리가 모여 있습니다. 안젤리나의 몽블랑, 피에르 에르메의 마카롱, 휴고 앤 빅터의 과일 타르트 등 특별한 디저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종이 잡지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장인이 자신만의 가게를 만드는 것이 당연한 파리에서 돋보이는 시도이고 디저트를 사랑하는 사람이 파리의 독창적인 디저트를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멋졌습니다.
다양한 책이 모여 있는 곳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잡지, 신간 서적, 베스트셀러를 보면 그 지역의 사람들이 어떤 것에 집중하는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출판사가 운영하는 서점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는데 오랜 역사를 가진 아트북 출판사의 공간은 압도적인 인상이었습니다. 타셴의 놀라운 아이디어, 애슐린의 색감, OFR의 날 것이 멋졌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이본 랑베르 북샵이었습니다. 이본 랑베르는 혁신적인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갤러리스트로 유명합니다. 다양한 예술가를 프랑스에 소개한 랑베르는 갤러리 옆에 아트북샵을 열어 출판물, 인쇄물, 예술 서적, 예술가의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행사를 주최하기도 합니다.
서점에서 우연히 한국 점원분을 만났고 뒤편에 있는 작은 공간의 현대적인 컨셉의 사진전을 소개받았습니다.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멋진 할아버지가 다가왔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 물었고 우리는 한국에서 왔고 멋진 전시인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알고 보니 멋진 할아버지는 전시 작가분이셨고 잡지사 인터뷰 및 촬영을 위해 방문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본 랑베르가 결코 작은 이름이 아니지만, 동시대 살아 숨 쉬는 예술을 소개하는 작은 서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작가, 사람들에게 알리는 잡지사까지 한 곳에서 만나니 파리가 예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타오르는 불씨
결과를 위한 냉정한 마음과 과열된 생각에서 벗어나, 삶과 일에 대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서의 일은 보통 문제 해결이 목표입니다. 모든 현상을 문제, 해결, 증명으로 치환해 효과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IT 서비스를 하는 회사의 디자이너로서 활동하면서는 주로 불편함을 해결하거나 제품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 또한 멋진 일이었지만 마음 어딘가에서는 항상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풍스러운 영감이 넘치는 공간, 우아함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들이는 여유,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기회. 파리라는 도시는 즐거운 관광 이상이었습니다. 내게 중요한 가치를 지키고 꾸준히 사랑하는 것에 애정을 쏟는 것. 남들이 말하는 멋짐을 따르기보다 나만의 좋음을 따르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짧은 삶 속에 더 많은 것을 풍성하고 밀도 있게 경험하고 내가 사랑하는 디자인이 더 성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적당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법이 아니라 정말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멋짐을 향해!